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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_ 국내 석유화학공업의 발흥2


여천석유화학단지는 4억 2,700만 달러의 사업비를 들여서 약 100만 평의 부지에 나프타 분해공장과 석유화학계열공장은 물론 각종 기반시설과 부두시설 등을 건설하는 것으로 계획되었다.

 

 
1972년 울산석유화학단지가 완공되면서 석유화학공업은 본격적인 성장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이 무렵 우리나라는 산업사회로의 전환 속도가 빨라지면서 석유화학 제품의 수요는 모두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을 만큼 급신장했다. 대규모 석유화학단지를 조성해 공장을 가동했으나, 급증하는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울산석유화학단지만으로는 절대적으로 부족하였다.
석유화학공업은 천연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의 시장여건에서 전통상품을 대신해 생활과 밀접한 거의 모든 제품을 생산하는 꿈의 제조업이었다. 실제로 석유화학공업의 발전으로 국내시장에는 합성섬유로 만들어진 의류, 다양한 플라스틱용품들, 신발과 타이어 등의 고무제품, 자동차부품과 가전제품, 농업용 필름, 전선피복, 세제, 그리고 각종 화공약품 원료 등 무수한 제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들 석유화학제품들은 새로운 소비영역으로 떠오르며 소비자들의 일상적인 생활기반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이 때문에 석유화학제품의 공급이 부족할 경우 많은 사람들의 생활에 불편을 초래하는 것은 물론 국가 전체의 물가안정에도 위협이 되었다.
이에, 1970년대 들어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경제개발을 추진하던 정부는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2~1976) 기간 중에 석유화학공업을 중화학공업 분야의 핵심사업으로 육성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1973년 7월 24일 ‘석유화학공업 육성 기본계획’을 통해 석유화학공업 진흥을 위한 정부정책의 기본방향을 수립하였다.
이 기본계획에서 정부는 기존 울산석유화학단지의 시설 확장과 함께 제2석유화학공업단지를 전라남도 여수 부근의 해안가에 건설하기로 하였다. 우선 연산 10만 톤 규모인 울산석유화학단지를 1976년까지 30~35만 톤 규모로 증설하고, 이어 여수에 건설이 추진되는 제2정유공장(호남정유)을 원료공급지로 삼아 1978년까지 에틸렌 연산 30만 톤 규모의 여천석유화학단지를 조성하기로 하였다. 여천석유화학단지는 4억 2,700만 달러의 사업비를 들여서 약 100만 평의 부지에 나프타분해공장과 석유화학 계열 공장은 물론 각종 기반시설과 부두시설 등을 건설하기로 하였다.
[표 1-1] 석유화학공업 육성 기본계획 (1973. 7. 24)
구분 주요 내용
공장규모(연간) - NC공장 30만 톤(에틸렌 기준)
- 저밀도 폴리에틸렌공장 15만 톤
- HDPE공장 4만 5,000톤
- VCM공장 10만 톤
- 스티렌모노머공장 7만 톤
- 아크릴로니트릴공장 5만 톤
- 폴리프로필렌공장 10만 톤
- 폴리스티렌공장 6만 톤
- PVC공장 10만 톤
- DMT/TPA공장 10만 톤
- 무수(無水)프탈산공장 2만 톤
단지규모 - 약 100만 평
건설비 - 내자 1억 2,900만 달러
- 외자 2억 9,800만 달러
- 합계 4억 2,700만 달러
건설기간 - 1976 ~ 1978년


정부가 여수를 제2석유화학공업단지 부지로 선정한 것은, 이곳이 바다와 인접하여 석유화학단지에 반드시 필요한 해상물류에 유리할 뿐 아니라 크고 작은 산들이 감싸고 있어 풍파가 적고 안전도가 높은 천혜의 입지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1960년대에 추진된 제1,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주요 사업들이 영남지방에 집중되었다는 점을 감안하여 1970년대에는 호남지방에 공업단지를 안배한다는 정책적 배려도 작용하였다.
이로써 중화학공업 분야 가운데 가장 빠르게 성장하던 석유화학공업은 제2단계 사업으로 이어지며 우리나라 산업경제에 석유화학시대의 도래를 가속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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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절 석유화학산업의 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