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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석유화학과 제일화학공업의 합작투자 기본계약 체결_1974.10.15

 
 

2 _ 합작투자계약 체결


오일쇼크의 악재 속에서도 정부는 경제개발정책의 일환으로 추진 중이던 창원기계공장, 온산제련소, 거제도조선소 등 국가산업단지와 중화학공장의 건설을 강행하였다. 그 중에는 여천석유화학단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수석유화학은 1973년 12월 출범과 동시에 일본 측 합작선과의 합작계열사 설립 작업을 본격화하였다. 미쓰이그룹의 투자회사인 제일화학공업과는 여천석유화학을, 미쓰비시그룹의 투자회사인 일본종합화학공업과는 호남석유화학을 각각 50대 50의 비율로 출자하여 설립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1973년 말 발생한 중동전쟁으로 인해 제1차 오일쇼크가 닥치면서 합작계열사 설립 작업에 제동이 걸렸다. 오일쇼크의 여파로 주요 선진국들이 마이너스 성장을 면치 못하는 가운데, 일본의 투자사들이 투자를 보류하기로 결정하면서 사업은 갑자기 동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오일쇼크의 여파는 매우 컸다. 석유의존도가 높은 선진국들은 물론 우리 경제도 오일쇼크에 원자재난이 더해지면서 심각한 침체에 빠져들었다.
특히 석유화학산업은 오일쇼크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데다가, 화학섬유 등 관련업계가 매출 급감으로 조업단축에 들어가면서 경기가 급속히 후퇴하는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오일쇼크의 악재 속에서도 정부는 경제개발정책의 일환으로 추진 중이던 창원기계공장, 온산제련소, 거제도조선소 등 국가산업단지와 중화학공장의 건설을 강행했다. 그리고 그 중에는 여천석유화학단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일쇼크의 영향이 한창이던 1974년 5월 18일 정부는 여천석유화학단지 건설을 촉진하기 위한 새 해법을 제시하면서 사업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우선 에틸렌 기준 연산 30만 톤 규모의 나프타분해공장 2기를 동시에 건설하려던 계획을 변경해 35만 톤 규모로 1기만을 우선적으로 건설하도록 했다. 석유화학계열공장은 여수석유화학이 합작선과 협의하여 조속히 건설을 진행하되, 카프로락탐과 DMT/TPA 등 일본 측이 기피하는 일부 사업은 여수석유화학 단독으로 추진하기로 했다. 공장이 들어설 총소요 부지면적은 기존 140만평에서 129만평으로 축소 조정하고, 부지 전체를 일괄매입하되 그 중 100만평만을 공장부지로 조성하기로 했다. 이와 함께 부두시설 등의 기반시설은 공용시설로서 정부가 건설하기로 하였다.
 
 
 
 

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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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절 호남석유화학의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