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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_ 사업추진을 위한 차관 도입


대일 차관 교섭을 위한 정부 협상단이 어려움을 겪었으나 우리 정부의 강력한 의지로 자금조달의 고비를 넘을 수 있었다.

 

 
1974년 11월 30일 여수석유화학은 미쓰이그룹과의 합작투자 기본계약에 대해 정부의 인가를 신청하였다. 이에 정부가 1975년 2월 1일 이를 인가하면서 각 부문별로 사업에 속도가 붙기 시작하였다.
정부는 여천석유화학사업이 본궤도에 진입하자 나프타분해공장 사업을 담당할 조직 구성에 착수하였다. 이에 따라 1975년 4월 16일 여천석유화학단지의 나프타분해사업을 담당할 새 회사로 한국종합화학이 전액 출자한 호남에틸렌㈜이 설립되었다. 호남에틸렌은 1975년 4월 16일 출범과 동시에 여수석유화학 김필상 사장을 초대사장으로 선임했다. 공석이 된 여수석유화학 사장에는 장지수 한국비료공업 사장이 취임하였다.
호남에틸렌이 설립되자 나프타분해사업은 호남에틸렌에 인계하게 되었고, 여수석유화학은 미쓰이그룹의 제일화학공업과 함께 4개 석유화학계열공장의 설립에 전념했다. 자금조달을 맡은 제일화학공업은 1975년 7월 18일 일본정부에 해외투자인가를 신청하는 한편, 통산성, 대장성 등의 관계당국, 그리고 일본 수출입은행과 약 2억 달러 규모의 차관 교섭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자금조달 과정에 예기치 않은 장애가 발생하면서 사업 전체가 자칫 암초에 부딪칠 위기에 직면하였다. 일본정부가 미쓰이그룹과 미쓰비시그룹이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중동산유국에서도 석유화학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어 해외투자가 중복된다는 점과 여천석유화학단지가 일본시장에 미치게 될 영향 등을 내세워 제일화학공업의 해외투자 인가를 보류한 것이다. 자금조달이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닥치면서 사업은 또 다시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미쓰이그룹에서는 투자단 3개사의 사장단이 통산성을 방문해 확고한 사업추진 의사를 표명하였다. 또 제일화학공업은 한국시장에서 원료인 나프타가 과잉이어서 값이 저렴하고, 한국정부가 석유화학공업을 육성하는 데 의욕적이며, 공업용지 조성의 여지가 많고, 양질의 노동력이 구축돼 있다는 점 등을 강조하며 사업의 타당성을 적극적으로 설명하였다.
한국 측도 1975년 9월, 육군참모총장(대장)과 외교관을 지낸 백선엽 한국종합화학 사장, 해군참모총장(대장)을 역임하고 예편한 장지수 여수석유화학 사장, 육군 소장 출신의 김필상 호남에틸렌 사장, 그리고 마경석 여수석유화학 부사장과 최병오 엔지니어 등 여천석유화학단지 사업의 관계사 사장단을 중심으로 협상단을 구성하여 대일 차관 교섭을 위해 직접 일본을 방문하였다.
예비역이기는 하지만 ‘별이 10개나 되는 실력자들’이 일본으로 날아간 것이다. 협상단은 일본의 통산성, 대장성, 의회의 상공위원회 등 주요기관과 일일이 접촉하면서 일본정부의 사업지원을 요청했다. 일본정부의 차관 승인을 받지 못하면 사업은 무산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사업이 제자리를 찾기까지는 오랜 시일이 걸리는 것은 물론 국내 석유화학공업의 발전에 큰 어려움이 따를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또 여수석유화학에 자원해온 직원들도 이전 직장으로 되돌아가기가 난감해지는 등 크고 작은 문제가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협상단의 행보는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그러나 협상단은 일본정부가 당초의 입장을 완강하게 고수함에 따라 큰 소득 없이 귀국해야 하였다. 이후에도 다양한 경로로 일본정부를 설득하는 노력을 계속했지만, 일본정부는 사업계획이 미진하다고 지적하는 것은 물론 “대한민국은 올림픽과 세계박람회를 동시에 개최하려 하느냐”는 비아냥도 서슴지 않았다. 당시 한국정부가 제2제철과 제2석유화학공업단지를 동시에 추진하는 것을 빗댄 냉소적인 반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로서는 일본으로부터의 차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었으므로 일본정부를 설득하려는 한·일 양측 관계자들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그러자 일본정부는 한 걸음 물러서서, 당시 한국정부가 추진하고 있던 제2제철과 제2석유화학공업단지 사업 중 한 곳에만 자본재차관을 제공할 수 있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일본정부의 이같은 입장은 오원철 경제수석을 통해 청와대에 보고되었다. 보고를 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여천석유화학단지 건설을 최우선 사업으로 선택하여 추진한다는 결단을 내렸다.
한국 정부가 이처럼 여천석유화학단지 건설에 강력한 의지를 나타내자 일본정부도 더 이상은 차관제공을 지연하기가 어려워졌다. 결국 일본 통산성은 1975년 11월 26일 제일화학공업에 차관을 제공하기로 방침을 정하였다. 이 때 일본 통산성이 확정한 사업추진방침은 [표 1-6]과 같다.


[표 1-6] 일본 통산성의 확정된 사업추진 방침 (1975. 11. 26)
구분 주요내용
차관규모 - 현금지불 계약분 미화 2,000만 달러
- 차관계약분 미화 3억 달러
- 총액 3억 2,000만 달러
연도별
차관금액
  • - 1976년 : 미화 2,000만 달러
  • - 1977년 : 미화 2억 2,000만 달러
  • - 1978년 : 미화 6,000만 달러
착수금
  • - 차관공여 관례에 따라 15%
공여방식
  • - 일괄계약하되 연도별 차관계획에 따라 분할하여 공급


이로써 여천석유화학단지 조성사업은 사업추진 과정에서 가장 큰 난관이었던 자금조달의 고비를 넘기고, 본격적인 사업추진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는 한 나라의 최고위 장성 출신 최고경영자들이 자존심마저 내던지고, 오로지 조국의 산업발전을 위해 헌신한다는 각오로 일본측 관계자들과 공동보조를 취하며 끈질기게 노력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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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절 호남석유화학의 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