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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천석유화학공장 합동준공식에서 동탑산업훈장 수상하는 최병오 이사_198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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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석유화학
준공식 날에
벌어진 일들

 


1980년 1월, 마침내 호남석유화학을 비롯한 공단 입주 5개사의 합동 준공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한국 석유화학산업의 첫 이정표가 세워진 것이다. 최규하 대통령은 치사를 통해 ‘거듭된 석유파동으로 자원난이 심각한 이때 우리가 5,000억 원이라는 막대한 자금을 들여 건설한 여수단지는 석유화학제품의 원활한 공급과 관련 산업의 발전에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넣어 줄 것’이라며, ‘1978년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약 47만 톤의 합성섬유를 면(緬)으로 대체하자면 나라 전체 밭 면적의 90%를 목화밭으로 바꿔야 한다’며 석유화학산업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한편, 이날 준공식에서 최병오 당시 이사가 동탑산업훈장을, 실무진들은 대통령 표창과 국무총리 표창을 각각 받았다. 호남석유화학을 위시한 5개 회사의 에틸렌 기준 35만 톤 규모의 납사분해공장과 9개 계열공장은 전남 광양만 내륙 쪽 한 모퉁이를 크게 바꿔놓았다. 전에는 농토와 야산이었으나 간척지를 포함해 약 85만 평의 부지에 들어선 최신 공장들이 장관을 이뤘다. 여수단지의 가동으로 한국 석유화학산업은 세계 24위에서 14위로 일약 발돋움했으며, 연간 약 9억 7,400만 달러의 수입대체 효과를 가져왔다.
특히 호남석유화학은 공장가동으로 연간 2억 달러의 수입대체 효과를 올렸으며, 국내생산이 안 돼 전량 수입에만 의존해오던 EG를 국내 생산함으로써 당시 국가 주요 산업이었던 섬유산업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준공식과 함께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 호남석유화학 여천공장은 건설과정에서도 공정의 선택과 공사감독 등을 호남석유화학이 주관하여 수행했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국내에서는 대부분의 공장이 외국기술자들에 의해 건설되었고, 울산석유화학 공장도 외국기업에 일괄하청(turn-key basis) 방식으로 건설된 터였다.
그러나 여천석유화학단지의 공장들은 울산공장 건설 당시 축적한 기술을 바탕으로 한국 기술진이 직접 참여하여 건설했다는 점에서 한국 산업사에 새로운 이정표가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다수의 기기와 부품을 국산품으로 채택함으로써 정부가 추진하던 국산화시책에도 크게 부응하는 성과를 창출했다. 국산화 확대를 위해 호남석유화학은 사내에 ‘국산화심의위원회’를 설치하고, 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산화가 가능한 설비 및 기기 대상을 선정했다. 그리하여 공정탑 부분, 열교환기류, 배관제, 펌프류의 각종 케이블 등을 국산품으로 채택할 수 있었다. 오늘날 호남석유화학의 준공식 날짜는 1980년 1월 29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실질적인 준공식 날짜는 이보다 전인 1979년 10월 26일이었다. 누구보다도 중화학공업 육성에 애착이 강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준공식 방문은 당연한 일이었다.
준공식 준비 간사들은 각종 팸플릿과 유인물, 행사 자재를 10월 26일에 맞춰 진행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방문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그날 대통령의 발걸음은 충청남도 당진에서 열린 삽교천 방조제 완공식과 KBS 송신소 완공식으로 옮겨갔다. 준공식은 뒤로 미뤄졌다.
당진 행사는 당일 행사인데 반해 호남석유화학의 준공식 일정은 이틀이 소요되는 데다 경호문제가 발목을 잡은 탓이었다.

 
 
 
 

스토리북

홈 스토리북 01 Chapter 롯데케미칼의 탄생 Section 02 마침내 기초소재산업의 기틀을 닦다 2. 호남석유화학 준공식 날에 벌어진 일들
Section 02 마침내 기초소재산업의 기틀을 닦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