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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석유화학 창립총회_1976.3.16

 
 

Section 01

롯데케미칼 창업전사(創業前史)

 



01

한국은 왜
올림픽과
세계박람회를
동시에 개최하려
하는가?

 


합작 사업 파트너로 미쓰이그룹이 선정되었지만, 미쓰이그룹 역시 오일쇼크 여파로 투자를 망설였다. 결국, 미쓰이그룹 회장이 청와대를 방문해 사업철수계획을 설명하는 자리가 만들어졌다.
“만약 미쓰이가 철수한다면 미쓰이그룹의 비료와 철강을 포함한 한국 내 사업 전체를 재검토하겠다.”
청와대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했고, 이는 주효했다. 이후, 합작사업은 순조롭게 진행돼 한국의 여수석유화학과 일본의 제일화학공업이 1974년 10월 합작투자 기본계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더 큰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 통산성은 제일화학공업이 신청한 해외투자인가를 쉽게 내어주려 하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본 수출입은행에 신청한 약 2억 달러 규모의 차관교섭 진행도 난항을 겪기 시작했다. 일본 통산성의 이러한 움직임은 미쓰이그룹이 이미 중동(이란) 석유화학산업 프로젝트에 투자 중인 점과 완공 이후의 여수석유화학단지가 일본경제에 미칠 영향을 고려한 것이었다. 이에 협상 실무자들은 한국 정부의 강한 의지와 양질의 노동력 그리고 공업용지의 조성 등을 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어 일본 당국을 설득해 나갔다. 그러나 사정이 이러한데 포항제철마저 일본에 차관을 신청한 터라 상황은 더 암울해졌다.
일본 정부는 여수석유화학단지 건설이 포항제철 확장공사와 맞물리니, 우선순위를 알려 달라며 짐짓 뒤로 내뺐다. 대일상업차관 교섭단 실무진으로 참여했던 최병오 전 부사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그때 일본 측 협상단이 뭐라고 했느냐면요, 너희 한국은 올림픽과 세계무역박람회를 동시에 개최할 생각이냐고 합디다.”
다시 말해, 여수석유화학과 포항제철 중복 차관 요청에 대해 한국 협상진들에게 면박을 주면서 한국으로 돌아가 우선순위를 정해 알려 달라는 것이었다.
한국이 올림픽을 실제 개최한 것은 1988년도의 일인데 10여 년도 더 전인 1975년에 두 가지를 동시에 치르겠느냐고 물어보는 저의는 명백한 비아냥에 다름 아니었다. 협상단은 분루를 삼키며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즉각 양국의 치열한 수 싸움이 시작되었다. 경제 수석을 통해 청와대에 이런 소식이 전해지자, 박정희 대통령은 여수석유화학단지 건설을 1순위 사업으로 추진할 것을 지시했다.
당시 여수 프로젝트는 미쓰이그룹이, 포항제철 프로젝트는 일본 제철업계 재벌인 일본제철이 강력하게 밀고 있었다. 사실 미쓰이 그룹의 사세(社勢)는 일본제철의 사세를 못 따라가던 터였다. 그래서 일본 측의 생각은 한국이 하나라도 제대로 얻고자 한다면 실현 가능성이 큰 포항제철을 우선순위에 올릴 거로 생각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로서는 허를 찔린 셈이었다. 한국이 이런 저간의 사정을 간파해 역으로 여수를 1순위로 올리자, 명분 싸움과 수 싸움에서 밀리기 시작한 일본 정부는 여수에 이어 포항제철 두 가지 프로젝트에 모두 차관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 만약 여수가 2순위로 결정됐다면 여수석유화학단지 조성 프로젝트는 상당히 지연되어 미래를 기약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두 프로젝트는 한꺼번에 성사됐다.
일본 통산성이 1975년 11월 차관 제공 방침을 확정하면서, 자금 문제가 해결되자 여수석유화학과 제일화학공업은 1976년 2월 합작사 명칭을 호남석유화학주식회사로 확정하고, 동년 3월 8일 발기인회를 개최, 동년 3월 13일 정관 공증을 마쳤다.
마침내 한국 석유화학산업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스토리북

홈 스토리북 01 Chapter 롯데케미칼의 탄생 Section 01 롯데케미칼 창업전사(創業前史) 1. 한국은 왜 올림픽과 세계박람회를 동시에 개최하려 하는가?
Section 01 롯데케미칼 창업전사(創業前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