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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산업과 호남석유화학 주식인수계약 체결_1979.1.30

 
 



03

민영화를 통한
경영기반 조성과
오일쇼크 극복

 


롯데가 한국석유화학공업의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의지가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민영화로 인해 호남석유화학은 롯데그룹의 일원이 됨과 동시에 지속적인 성장을 향한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다.

 
 
 

정부의 석유화학단지 건설 계획 발표 후 7년여, 각종 산고를 거치며 여수석유화학단지가 완공되어 가자 정부는 계열공장 사업은 실수요자 중심으로 민영화하기로 한다.
이에 공개경쟁입찰로 사업자를 지정하고자 했으나, 워낙 투자규모가 방대하고, 1·2차 오일쇼크의 여파에 따른 대내외적인 여건의 악화로 쉽게 투자에 나서는 기업이 없었다. 그러나 일찍부터 기초소재산업의 중요성과 국가 경제에 미칠 파급력을 예의주시해온 롯데그룹은 대림산업과 함께 등록입찰을 마치고, 최종 일괄 낙찰자로 선정되었다. 이후 정부권고에 따라 지분 20%를 대림산업에 양도해 1979년 3월 명의변경을 마침으로써, 호남석유화학은 롯데그룹의 일원이 되었다. 석유화학산업의 불모지였던 한국에 과감한 투자로 새바람을 불어넣었던 롯데그룹은 이후 호남석유화학을 집중적으로 육성해 오늘날의 롯데케미칼을 만들게 된다.
단일회사의 공장규모로서는 엄청난 건설비와 제조비가 투입되어 가동된 호남석유화학은 구조적으로 높은 원가, 시장기반의 취약 등 신설 공장이 갖는 불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아울러 불어닥친 2차 오일쇼크는 연 10%의 경제성장률을 보이던 한국 경제를 단숨에 나락으로 밀어 넣었으며 호남석유화학에 큰 시련을 주었다. 1980년도의 경제성장률은 -1.5%대로 떨어졌다. 특히 급격한 유가인상으로 인한 제품가격 상승은 이제 막 상업생산을 시작한 호남석유화학을 판매부진에 빠지게 했다. 가동률은 60%, 영업이익률은 -7%까지 떨어졌고 원료공장이 최소가동률을 밑돌자 조업중단(shut down)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80년 상업생산 개시 원년의 성적표는 매출 1,000억 원에 적자 70억 원을 기록하는 것으로 마감했다.
시장 상황이 나아지길 기다리며, 호남석유화학은 획기적인 원가절감 노력과 생산성 제고를 추구했다. 우선 생존을 위한 전사적인 에너지 절감 혁신운동에 나섰다. 당시 윤지규 공장장의 지휘 아래 여수공장 직원들이 머리를 맞대어 아이디어를 낸 결과 VVVF를 최초로 도입하고, 열회수교환기 30기 설치와 PE 공정전환 등의 원가 절감 노력을 해나갔다. 여기에 더해 70년대 설계 기준을 80년대에 맞춰 공장을 전면적으로 개조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설계기준 스팀사용량이 시간당 120톤에서 40톤으로 65.2% 낮아졌다. 전력 절감률은 28.7%에 이르는 성과를 거뒀다.
자구책에 이어 다행히도 1982년 들어 유가가 안정되어갔고, 호남석유화학은 완연한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수출 주요 품목은 PP필름, PP YARN, HDPE 필름 및 모노필라멘트 grade였는데, 품질면에서 세계적인 호평을 받았다. 또한, 수출용 원자재인 MEG의 수요증가에 힘입어 HDPE와 PP의 수출을 포함해 1982년에는 총 1억 100만 달러를 수출하기에 이른다. 11월 수출 1억불 탑 수상을 계기로 재무구조는 흑자로 돌아섰고, 범용수지 생산에서 복합수지 생산을 위한 신기술 개발에 나서게 된다.

 
 
 
 

스토리북

홈 스토리북 01 Chapter 롯데케미칼의 탄생 Section 02 마침내 기초소재산업의 기틀을 닦다 3. 민영화를 통한 경영기반 조성과 오일쇼크 극복
Section 02 마침내 기초소재산업의 기틀을 닦다